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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수록 쌓이는 쌓일수록 지워지는   6th solo exhibit

2022. 3.23 - 3.30 공간지은

집안의 책장 한 켠, 작업실 벽 거울, 주변의 소외된 공간… 나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시간을 바라본다. 시간은 모든 것을 불투명한 겹으로 쌓으며 내가 경험한 처음의 감정과 이미지, 기억들을 지워간다. 그렇게 없어져가는 것 같던 시간들은 그만큼의 두께로 나의 주변_ 소외되었던 공간에서 지층처럼 쌓여갔다.

반복된 선을 긋고 쌓아가는 행위는 지층을 바라보는 나의 방법이며 작업에 주로 사용되는 거울은 지층 사이로 보이는 일상적 사건들과 함께 나를 마주하는 공간이 된다. 반복된 선이 쌓여갈수록 그곳의 일상은 점차 지층의 단면 속으로 스며들 듯 지워져 간다.

text 

2021.3.10

나의 작업은 일상적인 주변의 물건과 마주하는 주관적 시선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일상적 지층으로 시선을 옮겨 중첩된 시간의 단면에 관한 작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책장은 주변에서 마주하는 공간 중에서도 일상의 지층이 쌓여가는 곳이며, 시선이 머물다 간 자리에 덩그러니 꽂혀있는 책들을 보며 소외된 공간에 내려 앉은 커다란 지층으로 여겨졌다. 여행 중, 캐년에서 인상깊게 본 지층 단면을 스크래치로 표현하여 거울 속 책장 이미지와 중첩 시키고, 그 사이로 비치는 '나'를 마주하도록 했다. 거울 속 ‘나’를 인식하는 것은 순간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 연속된 시공간의 어느 한 지점과 닿아 있는 ‘나’를 보는 것과 같다. 책장 사이로 보이는 나는 어느덧 두텁게 쌓인 일상의 지층 속에서 무뎌진 시선, 곧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마주한다.

The vertical section of a moment   5th solo exhibit

2020. 5.20 - 5.24 CICA Museum

이 진 영 

 

우리 주변의 물건들은 어느 한 때의 기억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뿌옇게 옅어지는 기억, 일상적 사건, 사람, 감정들을 처음의 그것으로 기억하고, 바라보고, 느낄 수 없으며, 이들은 곧 불투명한 시간의 겹 속에 놓이게 된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순수한 기억을 지닌 객관적 사실 곧 개인의 역사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한다. 우리가 접하는 일상은 여러 가지 복잡한 시각과 지각의 체계도 섞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엔 지층과 같이 응축된 사실만이 우리와 마주하게 된다.

나의 작업은 일상적인 주변의 물건과 마주하는 우리의 주관적 시선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으며, 몇 년 전 여행을 하면서 거대한 얼음 빙하 속을 들여다볼 때 느낀 아득함은 일상의 정지된 사건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캐년의 첩첩이 쌓인 지층을 보며 우리 주변에 쌓여가는 일상적 지층으로 시선을 옮겨 중첩된 시간의 단면에 관한 작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또한, 랩을 쌓거나 선을 긋는 반복된 행위를 통해 물건에 대한 기억된 감정의 무뎌짐과 점차 드러나는 객관적 시선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 시간의 방향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책장은 주변에서 마주하는 공간 중에서도 일상의 지층이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곳이다. 스크래치된 캐년의 지층_선을 거울 속 책장 이미지와 중첩시켜, 그 사이로 비쳐지는 '나'를 마주하도록 했다. 거울 속 ‘나’를 인식하는 것은 순간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 연속된 시공간의 어느 한 지점과 닿아 있다. 동시간으로 형성되는 우리의 기억도 이와 같아서 휘감아가는 시간겹으로 스며들어가는 일상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련의 작업들은 희뿌옇게 떠올리는 기억과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시간이 지나 점차 무뎌지는 우리의 시선을, 겹겹이 쌓은 투명 랩과 불투명한 선으로 환원하여 제시했으며, 두텁게 쌓인 일상의 겹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무의식 중에 행하는 일상의 습관적 행동들이 신체의 감각과 감정을 점차 무뎌지게 하는 현상을 반영한다. 이는 대상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결국엔 그것을 떠나 보낼 수 있는 객관적 시선, 곧 무뎌진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일상적 지층랩    4th solo exhibit

2019. 7.24 - 7.30 Gallery DOS

무뎌짐의 공간

 

글_ 강 정 호

 

 

I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서 책장과 선반은 스쳐가는 기억들이 전시되는 특별한 공간이 된다. 그 곳엔 낙서에 가까운 그림, 비뚤배뚤 쓴 글씨, 아무렇게나 주물러 놓은 고무찰흙이 작품으로 선정되고, 때로는 열매, 나뭇잎, 돌멩이와 같은 자연물이, 때로는 구슬, 인형, 팽이와 같은 장난감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머무른다.

전시가 지속되는 기간은 기억들이 반짝이는 기간과 같다. 보는 이의 시선은 투명한 막처럼 그들의 표면에 살며시 내려앉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겁고 불투명하게 된다. 찬란한 반짝임은 반복되는 바라봄 속에 점차 사그라진다. 보는 이가 더 이상 최초의 빛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나 선반에 놓여 있는 일용품과 다름없는 사물이 된다.

그렇다면, 반짝임이 사라진 사물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원래 있었던 일상의 자리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마저 어렵다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질 것이다. 하지만 예전의 사물이 되었든, 쓰레기가 되었든 그들은 빛을 잃은 존재로서 저물었고, 보는 이의 무뎌진 시선은 그 사물을 무심히 일상 속으로 돌려보낸다.

 

 

II

 

사물의 반짝임이 사라지고 무뎌진 시선이 쌓이는 자리에서 이진영의 작업은 진행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하강하고 퇴적하는 엔트로피의 운동에 자신의 감각을 맡긴 채, 기억의 자취에 대해 고민한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에 저물어 있는 사물들을 차분히 되새긴다.

 

집안 한 구석에 늘 걸려있던 인상 깊은 그림은 점차 시선이 머물지 않는 벽처럼 되어가고, 테이블에 놓인 귀여운 인형은 시선이 머물지 않는 물건이 되어 시간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이진영 「일상적 지층랩」

 

이진영은 집안 한 구석에 걸려 있는 그림 앞에 다시 섰지만, 그녀가 한 때 느꼈던 ‘깊은 인상’은 거기에 없다. 테이블에 놓인 인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이 느꼈던 ‘귀여움’을 여기에 돌이킬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이 그것을 느꼈다는 자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섣부른 상실감에 현혹되지 않고, ‘깊은 인상’과 ‘귀여움’의 부재에서 산출되는 공간감과 원근감을 섬세하고 침착하게 탐색한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뿌옇게 옅어지는 기억, 일상적 사건, 사람, 감정들을 처음의 그것으로 기억하고, 바라보고, 느낄 수 없으며, 이들은 곧 불투명한 시간의 겹 속에 놓이게 된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순수한 기억을 지닌 객관적 사실 곧 개인의 역사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한다.

 

이진영 「일상적 지층랩」

 

여기서 이진영은 ‘순수한 기억’을 언급한다. ‘순수 기억(souvenir fur)’은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제시한 개념으로, 경험적인 현실 바깥에 존재하는 기억의 잠재적인 양태를 말한다. 순수 기억은 소진되거나 상실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현실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로 순수 기억은 ‘강함’이나 ‘귀여움’ 같은 감각적인 특질을 가질 수가 없다. 그 대신 그것은 씨앗처럼 그러한 특질의 계기가 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기억은 잠재되어 있던 순수 기억이 현실화된 것이다. 또한 경험 세계에서 소진된 기억은 순수 기억의 잠재된 양태로 돌아간다. 그래서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발언이 자연스럽게 성립하는 것이다.

아름답게 반짝였던 기억의 순간이 시간의 진행에 따라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는 게 아니라 잠재된 양태로서 일상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가정은 기억에 대한 미학적 접근을 온전히 다르게 만든다. 이진영이 기억의 부재를 다루면서도 지나친 감상(感傷)에 빠지지 않고, 탐구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이다. 그녀는 기억의 부재에서 산출되는 아득한 공간감과 원근감을 따라가다가 현실 기억과 순수 기억 사이의 경계에 닿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쌓이는 현실의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그녀는 순수 기억의 동결된 세계를 바라볼 수만 있을 뿐 횡단할 수가 없다. 돌이킬 수 없이 상실했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빛은 저 너머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지만, 그 찬란한 반짝임은 그녀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과 감각의 바깥에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더욱 완전한 잠재태가 되는 순수 기억의 역설은, 현실에서 경험되는 기억의 사라짐을 가능한 실재에 가깝게 형상화시키고자 하는 그녀에게 쉽지 않은 과제가 된다.

이진영은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이러한 난제를 해소하는데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두 가지 경험을 얘기한다. 그것은 거대한 얼음 빙하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던 경험과 캐년에 노출되어 있는 지층을 접했던 경험이다. 이는 집안 한 구석에 걸려 있는 그림을 살펴보거나, 테이블 위의 인형을 바라보는 행위의 반대편에 위치한 비일상적인 경험이다. 그녀는 아득한 빙하의 내부를 들여다 보다 문득 ‘정지된 시간’과 대면한다. 마치 순수 기억이 감각할 수 없는 무엇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기억을 지탱하는 하나의 지평으로서 제시되듯이, 압도적인 자연 현상에서 마주하게 된 ‘정지된 시간’도 끊임없이 지속하는 일상의 시간을 재정립하는 하나의 계기로서 수용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장대한 절벽이 노출하는 지층을 바라보다가 맞이하게 된 ‘순간의 단면’도 덧없이 사라지는 일상의 순간을 재해석하게 만드는 단초가 된다.

 

거대한 얼음 빙하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느낀 아득함은 정지된 시간, 일상적인 사건에 점점 더 몰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캐년의 첩첩이 쌓인 지층을 보며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일상적 지층으로 시선을 옮겨 중첩된 시간의 절단면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이진영 「일상적 지층랩」

III

 

이진영의 작업은 위에서 논의한 내용들을 시각적으로 응축한다. 그녀는 ‘집안 한 구석에 걸려 있는 그림’과 ‘테이블 위의 인형’과 같이 자신의 일상에 실제로 머물고 있는 사물을 매개체로 삼아, 우리 삶에 찬란한 반짝임을 선사한 채 사라지는 기억의 자취를 드러내고자 한다. 직접적으로 시각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기억의 자취를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사물(혹은 그 사물의 이미지)의 표면에 투명한 랩을 쌓는다.

반복적으로 랩을 쌓는 행위는 이진영의 작업에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그녀는 이를 통해 하강하고 퇴적하는 엔트로피의 운동을 적절하게 형상화시킨다. 랩을 쌓는 행위는 무심하게 지속되면서 친숙한 일상의 사물을 불투명한 공간 속으로 가라앉힌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인 거리감은 심리적인 소외감으로도 이어져서, 그 사물을 우리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공간 자체를 생경하게 마주하도록 만든다.

 

반복하여 랩을 쌓는 일은 그 대상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결국엔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 곧, 무뎌진 시선을 갖게 되는 일이라 하겠다. (...) 투명한 랩을 겹겹이 쌓는 반복된 행위로 구현되는 덩어리들은 그것 자체로 고요하고 응집된 일상을 담고 있다.

이진영 「일상적 지층랩」

 

랩 쌓기라는 엔트로피적인 행위를 통해, 선명했던 사물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가라앉히고, 그들이 수렴되는 생경한 공간을 ‘겹층’을 이룬 ‘덩어리’로 대면하는 일, 이진영은 자신의 작업에서 구현하고 있는 그 행위를 ‘객관적인 시선’을 갖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발언의 의미는 그녀의 작업과 병치시켜서 살펴보았을 때, 파악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불투명한 덩어리나 면(面)으로 제시되는 이진영의 작업을 마주하였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감상은, 불가사의한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에 서 있다는 느낌이다. 그 속으로 불투명하게 가라앉고 있는 사물은 일종의 미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공간은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그저 생경하게 바라보게만 만드는 그런 공간이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이진영의 ‘빙하/지층’ 경험을 떠올리게 만든다(그녀의 작업 가운데는 아예 캐년의 이미지 위에 랩 쌓기를 한 것도 있다).

이진영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생경한 공간이 그녀가 거대한 얼음 빙하와 대면했을 때 경험했던 ‘정지된 시간’, 장대한 지층과 마주했을 때 경험했던 ‘순간의 단면’을 미학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형상화 작업의 궁극적인 지향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일상에서 산출되는 모든 기억들이 응축되어 사라지는 공간, 즉 현실 기억과 순수 기억이 맞닿는 경계를 감각할 수 있는 무엇으로 제시하는 일이다.

이진영은 이러한 경계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기울이는 노력을 ‘객관적인 시선’을 갖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는 그녀의 작업에 초대되는 관객들에게도 요구되는 과제일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듯,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무뎌진 시선’을 가지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제시되는 ‘무뎌짐’은 일반적인 둔감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담담히 수용하면서도, 기억의 빛이 스러지는 지점에 항시 머물러 있는 눈길, 아마도 그것이 이진영이 뜻하는 ‘무뎌진 시선’이 아닐까.

지층_랩

2019. 05.14 작가노트

지층_랩

 

  우리 주변의 물건들은 어느 한 때의 기억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뿌옇게 옅어지는 기억, 일상적 사건, 사람, 사고, 감정들을 처음의 그것으로 기억하고, 바라보고, 느낄 수 없으며, 이들은 곧 불투명한 시간의 겹 속에 놓이게 된다. 기억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순수한 기억_ 최초의 것을 지닌 객관적 사실 곧 개인의 역사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한다. 시간으로 겹쳐진 불투명한 기억들은 시공간의 가장 바닥에 깔려있는 순수한 기억이며, 점차 사라지는 그 순간의 단면에는 빼곡히 우리들의 일상적 이야기가 박혀 있어 감정이 무뎌진 객관적 사실로 존재한다. 나의 작업은 투명한 랩을 겹쳐가며 그 안의 물건을 희미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것의 단면층 사이에 비집고 보여지는 물건의 일부분을 통해 한때의 일들을 읽어가며 순수한 기억이 생성된 그 자체의 이미지나 형태 등에 집중하고자 한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지각하는 물질세계란 바로 생성의 순간화된 절단면이자 보편적 생성의 횡단면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접하는 현상은 순간으로 응축되고 그 순간에 여러가지 복잡한 시각과 감각의 체계도 섞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의 그것은 지층과도 같이 응축된 사실만이 우리와 마주하게 된다. 

 

  동시간으로 형성되는 우리의 기억은 마치 거울을 보며 반영되는 연속된 시공간의 어느 한 지점과 마주한다. 여행을 다니며 캐년의 첩첩이 쌓인 지층으로부터 느낀 신비로움과 거대한 얼음빙하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느낀 아득함은 지층으로 쌓인 정지된 시간, 일상적인 사건에 점점 더 몰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투명한 랩을 겹겹이 쌓는 반복된 행위로 구현되는 덩어리들은 그것 자체로 고요하고 응집된 일상을 담고 있다.

 

 ‘지층_랩’ 은 일상적인 주변의 물건과 마주하는 우리의 주관적 시선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집의 한 구석에 늘 걸려있던 인상 깊은 그림은 점차 시선이 머물지 않는 벽처럼 되어가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귀여운 인형은 어디에 놓이던 상관없이 시선이 머물지 않는 물건이 되어 시간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일련의 작업들은 희뿌옇게 떠올리는 기억과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시간이 지나 점차 무뎌지는 우리의 시선을, 물건이나 사진 등을 겹겹이 덮은 투명 랩으로 환원하여 제시했으며 두텁게 쌓인 일상의 겹을 보여주고자 했다. 반복하여 랩을 쌓는 일은 그 대상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결국엔 그것을 떠나 보낼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 곧, 무뎌진 시선을 갖게 되는 일이라 하겠다. 여기서 작업은 반복의 방식을 취하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일상의 습관적 행동들이 신체의 감각과 감정을 점차 무뎌지게 하는 현상을 반영한다.  

 

 아이린은 그 사연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대상물과 맺은 애착관계가 어느 정도 느슨해지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다. 그녀는 이런 방식의 지속적인 치료를 통해 물건들을 떠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 잡동사니의 역습, p.68 -

 

 기억된 이미지를 덮어가는 불투명한 지층 랩은 우리로 하여금 주관적인 막을 깨닫게 한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관람자가 물건을 덮은 불투명한 겹을 들여다보며, 매 순간 무뎌져 가는 우리의 주관적인 막을 깨닫고, 우리의 일상적 사건들도 그와 같아서 삶을 대하는 시선 또한 불투명하게 변해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일상을 따라오며 휘감아가는 시간의 겹 안에서 한때 그랬었던 일상적인 사건들은 정지되고 멀어져 갈 것이다.

정지된 일상적 사건   3rd solo exhibit

2016. 4.26 - 5.2 Cyart Document

Rolling – 정지된 일상적 사건

​이 진 영

 서랍 속에 간직했던 낡은 편지들, 어릴 적 소중했던 손때 묻은 곰 인형, 아이들이 정성 들여 그린 서툰 그림들….. 이들은 어디선가 꺼내주길 바라고 있는 나의 기억들이며 일상의 사건들이다. 처음의 감정은 벅차 오르게 기쁘고, 가슴에 멍든 듯 슬프며, 때론 비에 스미듯 잔잔하다. 바로 그 순간 물건들도 함께였던 것일까, 지금 내 옆에 있는 그것은 그때의 감정과 사건을 읽으라 한다. 순간은 현재에서 드러나며 순간으로 사라진다. 그 순간에 나의 기억이 담겨 있고 일상적 사건이 기록된다. 그러나 난 그 때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없고, 순간의 사건을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 현재의 ‘나’와 마주하고 있다. 오랜만에 꺼낸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별한 의미가 사라지고 한때 그랬던 사건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결국 어느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겨진 물건들은 우리의 주관적인 시각 곧 우리가 덧씌운 이미지 기억을 벗어버린 객관적 사물로 회복된다.

 투명한 랩을 켜켜이 감싸는 Wrapping Series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는 감정의 기억을 표현한다. 부엌에서 습관처럼 쓰던 랩은 어느새 작업의 재료가 되어 주변의 물건들을 하나씩 감싸기 시작했다. 여기서 재료는 나에게 추상적인 작업방식에서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며,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 이미지를 물질화하는 역할을 한다. 겹겹이 둘러싼 투명 랩 속의 물건들은 잔잔하게 멀어져 간 시간 속에서 결코 선명해진 수 없는 사건들이며, 아득한 시간 속에 순간으로 정지된 화석과도 같다.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는 자연 그대로의 빙하를 다듬어 만든 얼음 궁전이 있다. 작년 여름 그곳 어느 통로를 지나가면서 무심코 바라본 빙하 벽 사이에는 어둡고 끝이 없는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수천 년 동안 겹겹이 쌓인 시간들을 마주하며 빙하 속 저 멀리 순간으로 정지된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했다. 마치 빙하 속에 정지되어 있는 무언가처럼 우리의 일상적 사건도 겹겹이 쌓인 시간 속에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들여다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그것, 나는 그것을 현실의 공간에서 불투명한 몇 개의 덩어리로 제시하며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통해보려 한다.

 

 <Rolling>은 우리의 일상적 사건을 담고 있으며, 화석처럼 정지된 우리의 물건들은 겹겹이 싸인 불투명한 덩어리 속에 남아 우리에게 덧입혀져 있던 의미를 점차 털어낸다. 수많은 물건들이 늘어져 있는 공간을 몇 개의 덩어리가 굴러다니며 물건들 하나하나를 감추어간다. 그것들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커다랗고 불투명한 덩어리로 우리와 잠시 마주하고 또 다시 굴러갈 것이다.

어머니 아내 딸 혹은 비어있음  2nd solo exhibit

2014.2.28 - 3.17   ADAMAS 253

어머니, 아내, 딸, 혹은 비어있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박사과정 강 정 호

 

 

 이진영의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많이 닮았다. 그의 작품에는 아내, 어머니, 딸과 같은 여성 정체성에 충실하게 머물고 있으면서도 한 순간에 덧없이 스러질 것만 같은 어떤 자아가 표현되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주요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사랑받는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일상의 평온한 흐름에 순응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무화(無化)시킬 것 같은 고즈넉한 읊조림 속에 자신의 의식을 내맡긴다. 이진영의 작품도 빨래 손질, 장난감 정리, 폐품 처리 등 주부의 손길을 거치는 소소한 집안일을 소재로 삼는다. 하지만 이진영은 그것을 전형적인 여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활동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어머니도 딸도 아닌 어떤 존재의 내밀한 자기 물음으로 이끌어 간다.

 아내, 어머니, 딸이라는 여성 정체성은 가정이라는 공간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물론 그러한 정체성의 구속력은 과거에 비해 많이 느슨해졌지만, 그러한 정체성을 부여받은 이는 여전히 살림의 주체이자 책임자로서 ‘바깥’에서 돌아온 남편, 자식, 아버지의 먹는 일, 자는 일, 입는 일을 돌보게 된다.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먹고, 자고, 입는 일의 순환 속에 살림을 돌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성적인 존재로 변해 간다. 만약 그녀에게 바깥 생활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가정이라는 공간은 동일한 사태가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 회귀의 장소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그러한 공간에서 그녀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정체성을 지녔던 존재로 여겨진다. 가정의 안팎을 드나드는 남편, 자식, 아버지에게 집안에 붙박여 가사를 돌보는 아내, 어머니, 딸의 모습이 종종 영원히 변치 않을 무엇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어떠한 정체성도 그것을 부여받은 존재의 모든 것을 움켜질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지 않는 이상, 아무리 강력한 정체성도 언젠가는 균열을 일으켜 와해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는 어떠한 정체성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잔여를 남긴다. 가정이라는 공간과 일체가 되어 영원히 어머니나 아내로 있을 것만 같은 존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소설에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사랑받는 아내를 그러한 잔여 속에 용해시킨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이 돌보는 가족과 살림살이에 대해 고요한 어조로 읊조리고 있는 여인들은 주변 인물들에게 영원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그들은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어떤 낯선 존재가 되어, 눈앞을 스치는 삶의 광경을 사자(死者)처럼 처연하게 되뇌고 있다. 이진영의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자아도 집안일을 세심하게 돌보는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딸로서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아이가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남편이 입었던 옷, 아버지가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소지품과 같은 친숙한 사물을 매개로 하여, 아이-어머니, 남편-아내, 아버지-딸과 같은 가족 정체성을 부각시킨다. 그런 까닭에 이진영의 작품은 얼핏 보았을 때 그러한 가족 관계가 남기는 삶의 자취를 영속적으로 보존하려는 시도처럼 해석될 수 있다. 즉 어머니, 아내, 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살림살이에 남아 있는 가족의 자취를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더욱 신실한 어머니, 아내, 딸로 계속 남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선택한 표현기법인 ‘투명한 물질로 감고 쌓기’, ‘진공팩으로 흡착하기’, ‘물건에 지문 새기기’에 담겨 있는 보존, 축적, 각인의 의미도 이와 같은 통속적인 해석과 우연하게 맞물린다. 하지만 이진영의 작품 곁에 조금만 머물러 있어보면, 그러한 해석은 자연스럽게 수정된다. 가족들이 썼던 살림살이를 투명한 물질로 감고 쌓고 흡착시키는 이진영의 행위는 최초엔 무엇인가를 보존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처럼 다가오지만, 사물의 모습을 뒤덮을 정도로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오히려 무엇인가를 지우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행위로 변모한다. 이진영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물건들에 배어있는 ‘친숙한’ 자취가 아니라, 그러한 친숙함을 무심하게 무너뜨리고 있는 ‘감고 쌓고 흡착시키는’ 행위의 끝없는 흐름이다. 아이들이 처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지품과 같이 소중한 자취를 담고 있는 물건도 그와 같은 흐름 앞에서는 덧없이 해체되어 버린다. 이진영은 가족들이 바깥으로 나간 뒤 빈 집에 홀로 남아 살림을 돌보는 어머니, 아내, 딸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가정이라는 공간의 신실한 수호자가 아니라, 그러한 몰(沒) 인간적인 흐름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이진영의 작품에서 살림살이의 외양을 완전히 잠식하며 무한히 외연을 키워나가는 불투명한 덩어리들은 원통형의 비닐 롤, 지층처럼 누적된 진공용기, 바위덩어리 모양의 비닐 뭉치와 같이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된다. 그것은 어머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딸도 아닌 어떤 낯선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그 존재는 여전히 가정이라는 공간에 머물며 아이들의 장난감을 정리하고, 남편의 옷가지를 손보며, 아버지의 유품을 정돈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그에게는 무덤덤하고 낯설다. 예전에 자신이 어머니였고, 아내였고, 딸이었다는 기억만이 그 존재를 일상 속에 머물게 한다. 상품에 기입된 유통기한이나, 지문 찍는 일에 이진영이 관심을 보이며 작품에 반영하는 것도 이러한 허약한 머무름과 관계된 것일 테다. 왜냐하면 유통기한은 쓸모의 종료를 알리는 숫자이고, 지문은 그것을 찍은 이의 부재를 알리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이진영의 작품에 나타난 자아, 혹은 낯선 존재는 돌이킬 수 없이 텅 비어 있다.

 이진영이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인상적으로 언급하였듯이 그 존재는 ‘예전에 그랬었지..’ 라는 독백에 잠식되어 있다. 가족들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빈 집에 홀로 남은 그 존재는 어떠한 정체성에서도 벗어나 있는 무형의 덩어리가 되고, 낯선 흐름이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읊조림과 같이 사자(死者)의 시선을 담고 있는 그 흐름는 '예전에 그랬었지..’ 라는 독백만을 되뇌며 자신이 가졌던 모든 정체성을 용해시키며 텅 빈 여백 속에 흩어져 간다.  

The Things  1st solo exhibit

2013.11.20 - 12.3 Space INNO

​사색 속에 드러난 흔적의 조형

 

 

장준석(미술평론가, 한국미술비평연구소 소장)

 

 예술이란 감성의 산물로서 감성을 토대로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며 이를 예술로 승화하여 작품화한다. 예술성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취적인 발상과 조형 의식 및 수많은 실험 등을 통하여 문명 발전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왔다. 조각가 이진영은 예술성이 또렷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작가이다. 그는 특히 작품에 대한 접근이 진지하며 예술에 대한 통념적인 사고를 벗어나 실험성이 짙은 조형을 추구하는 전위적인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사르트르의 이야기처럼, 전위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전위적, 실험적이라는 말에는 가치 평가의 어떤 기준이나 조건도 예술적‧감성적으로 적용시키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진영의 전위적인 작품 세계는 특정한 유파적인 경향을 띄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서 현대 조형에 대한 아방가르드적인 성향이 더 강하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작가 이진영의 일련의 작품들은 현대 조형의 양식에 기초를 두면서도 모든 제약과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진취적․창의적인 성향이 뚜렷하다. 이처럼 실험성이 짙은 작품들은 대체로 난해하기도 하므로 창작 의도를 충분히 이해해야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아버지가 남긴 유품 속에서 작품의 발상을 얻었고 깊은 사유와 더불어 여기에 감성적으로 접근하여 조형적 이미지를 찾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옅어짐을 깨달았으며, 예술가다운 심도 있는 사색을 하였다. 작가의 조형 작업은 이처럼 당시의 감정과 느낌에 감성적으로 깊이 접근하면서 이미 사용된 것들의 본질적인 자아와 시간 및 흔적에 대해 사색하는 의미 있는 접근과 발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가는 이미 사용된 것들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들이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효용을 다하고 남긴 미묘한 흔적과 감흥, 사라짐과 탈색됨을 어떤 형태로든 조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조형화․이미지화하고자 한 작가의 초기 예술적 발상은 순수 취미 판단적인 성향을 내포하면서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과 감정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여러 대상들을 시간적인 것은 물론이고 공간적․형태적․시각적 혹은 후각적․촉각적인 것까지도 조형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지적․인식적인 면까지도 예술적 발상을 통해 조형화되는 독창적이고 실험성이 짙은 조형작업이다.

 

 예를 들어 작품 <지문찍기>는 많은 사람들의 손이 닿는 스테이플러나 전기면도기, 손잡이 등에 여러 지문을 남기며 당시에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사용되던 기물의 사용 흔적과 활동성 및 생명성을 선명하게 인식시키고 아련한 삶의 흔적을 회상시킨다. 이를 통해 작가는 스테이플러나 전기면도기 등의 내적 에너지나 생명력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을 부각시켰으며, 이를 통해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허무함을 조형적으로 다루고자 하였다. 이는 미적 사유의 틀로부터 벗어나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의 설정으로서, 전위적 실험성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자유로운 의지의 발로이자 적극적인 창작의 한 모습으로서 작가의 소중한 창작 에너지로 구축되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창작의 모습은 곧 전위적 성향으로서 과거에 창조된 것의 한 유형이 아닌, 진행형의 창조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작가의 경험과 추억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깊은 사색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차가운 현대 문명에 의한 공허함과 잿빛 도시 너머로 보이는 소외감 등이 전위적 진행형의 조형으로 화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미술의 특수한 전위적인 성격이나 양상은 차치하고라도 반아카데미즘적이다. 전위적인 어떤 것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아카데미즘화 되어 간다. 그럼에도 현재진행형의 전위성은 커다란 매력일 수밖에 없다. 작가 개인의 삶에 의한 것들이지만 이를 통해 보이는 역사성과 동시에 예지되는 현장성은 작가가 관심을 가져 온 독특한 전위적인 작품과 결합되면서 더욱 흥미를 유발한다.

 

 작품 <빨래>나 <옷걸이> 등은 진지하던 삶의 현장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탈색되거나 운이 떨어지는 것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운동복, 신발, 여름옷, 겨울옷, 작업복, 점퍼 등 다양한 빨래들이 담긴 투명한 비닐 팩은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강렬함과 깊이감, 현대인의 삶과 현대 문명, 여운을 압축한 극적인 표현 등 독특한 조형적 이미지는 작품을 한층 미적으로 승화시킨 듯하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사유적이고 철학적이다. 따라서 작가의 조형성은 어느 정도 개념적이면서도 뒤샹의 변기처럼 레이드메이드적이고 오브제적이다.

 

작가는 여러 대상을 통해 현대인들과 현대 문명에 대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남다른 애착과 더불어 현대적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순수함까지도 조형적으로 압축시켰다. 작가는 이처럼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에 대한 조형적인 접근에 비교적 성공하였으며, 상실감과 시간과의 의미를 표현하면서 새로운 현대적 조형감과 색채감 및 공간감 등을 개성 있게 조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의 멋과 맛을 살린 회화적인 질감과 색감 그리고 조형 언어 등을  토대로 한 감성에 몰입하였다.

 

 가능을 담은 새로운 것 혹은 미지의 것에 대한 새로운 창조로 마르셀뒤샹도 이와 같이 당시에 창조된 것으로서가 아닌 창조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창조라는 개념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종의 조형적 가능성이라 하겠다.

 

 작가 이진영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창조의 에너지가 흐른다. 이는 기존의 질서와 맹목적인 가치에 기반을 둔 꽁포르미즘적인 예술과는 상이한 새로운 생명력이다. 이율배반적인 여러 요소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서로 대항하거나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 새로운 존재감을 지닌 생명성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이는 조잡함이나 인위성이나 비예술성이 소멸되고 새로운 형상이 탄생되듯이 새로운 생명력이 표출되는 창의적인 조형의 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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